최근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과 '90년대 문화'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관객들의 아날로그 감성을 매료시켜 흥행대열에 올랐다. '추억'과 '향수'를 젖어 들게 하는 이 영화는 400만 관객을 불러모으고, 멜로 영화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필자가 영화 <건축학개론>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늘 상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양한 소감을 얘기하곤 한다. 그 소감 속에는 대부분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 스토리를 만든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 <건축학개론>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대목은 바로 '색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련한 첫사랑을 떠오르게끔 연출을 뒷받침한 파스텔 톤의 색감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최고조화 시켰다. 잘 만들어진 영화에 예쁜 색을 입혀 아름다운 영상미를 만드는 사람은 감독이 아닌 컬러리스트라는데. 영화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분위기메이커 컬러리스트 박진호 차장을 만나보자.

컬러리스트 박진호차장은 벌써 영화업계에 몸을 담은 지 12년째. 영화 <품행제로> CG 작업을 첫 시작으로, 2004년 영화 <아는 여자> 디지털 색 보정 작업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컬러리스트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참여한 다수의 작품 중에서도 빠질 수 없는 이야기는 최근 400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건축학개론>이다. 한국의 멜로 영화 흥행기록이 그리 좋지 않은 데에 비해 <건축학개론>은 로맨틱 멜로 영화로 성공한 작품인데. 그가 말하는 <건축학개론>의 성공비결은 무엇일까?

"먼저 이 영화를 만든 감독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화의 한 스텝으로서 생각했을 때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가는 건축 소재와 하나하나 쌓아가는 사랑의 관념적 의미가 잘 부합되어 사람들의 아날로그적 감성을 끌어내 공감하게 한 것이 가장 큰 성공비결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파스텔 톤의 색이 영화의 아련함을 자아내는데도 한몫 하지 않았나 해요.(웃음)"

<건축학개론>은 앞서 그가 언급한 바와 같이 잠들어있던 아날로그 감성을 깨우는 영화라고도 한다. 아날로그 감성? 그것은 풋풋하면서도 순수하며 억지스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과거의 감성을 말한다. 영화에서는 삐삐나 헤어 무스, 당시 유행하던 패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한옥집과 정겨운 골목길, 즐겨 듣던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그 감성을 자극하는데 한몫 했다. 현대에서 본 과거의 아날로그적 요소는 지극히 촌스럽고, 평범하지만 이 시기를 거친 사람들에게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았다. <건축학개론> 영화에도 그의 아날로그 감성이 반영되었을까?

"실제 영화의 세대가 제 세대이기도 한데요. 그 때는 요즘처럼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필름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사진관에 현상을 맡겨서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까 기대하며 기다렸던 설렘의 감성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영화에서 이런 설렘이나 첫사랑이라는 감성이 정확하게 무엇이다! 라고 설명할 수 없고, 또 나타나지 않잖아요. 그래서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은 색상과 명도가 뚜렷하지 않은 파스텔과 같은 오묘한 느낌이라 그 감정들과 최대한 어울릴 법한 색으로 표현 해 보았어요."

그렇다면 시나리오 구조상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색감의 차이는 어떻게 두었을까?

"과거 승민과 서연 같은 경우는 최대한 밝게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스모그 효과를 가미하고 뽀얀 느낌을 많이 주었고, 현실의 승민과 서연 같은 경우는 뽀얀 느낌보다는 조금 더 선명하고 정확한색을 주어 미묘한 차이를 두었죠."

한편, <건축학개론> 영화를 보고 많은 이들이 꼽는 명장면은 깨알 같은 웃음을 선사했던 납득이 출연장면과 제주도의 서연 집 옥상장면이 아닐까 한다. 관객의 입장이 아닌 제작자로서 꼽은 명장면은 어떤 부분일까?

"여러 부분 중에서도 승민과 서연의 첫 데이트 장면을 먼저 말씀 드리자면, 이 장면은 설레고 아름답게 표현된 철도길 위 장면이에요. 아름다운 장면의 하얀 흰색이 색 보정 작업 시 가슴 한쪽 걸림돌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추가적인 작업으로 푸른 하늘의 농도를 더욱 짙어지게 하면 어떨까 했더니 자연스러운 파란 하늘의 모습이 연출되더라고요. 그래서 작업하면서 기억에 남았던 명장면 중의 하나예요."

"다음은 승민과 서연의 첫 제주도 답사 장면입니다. 아쉽게도 날씨가 도와주지 못한 관계로 흐린 날 촬영이 되었어요.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 장면 뒤에 나오는 컷이 제주도의 푸른 모습이에요. 그래서 그 밝은 하늘과 이 장면의 하늘을 일치시키기 위해 섬세함이 살아있는 구름 섞인 하늘의 모습을 과감하게 오버시키고, 밝은 날씨처럼 표현해 보았습니다. 또 제주도의 바다색에 그린 색을 살짝 가미하여 에메랄드 빛의 바다색을 표현했는데요. 이 장면 역시 제가 꼽은 명장면 중의 하나입니다."

"제일 인상 깊었던 장면은 승민의 마음 표출 창구인 친구 납득이가 나오는 장면인데요. 영화에서 납득이는 승민이의 애타는 마음을 해결시켜주는 친구죠. 구구절절 한 연애방식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전봇대 및 가로등 설정을 극화시켜 연극 무대인 양, 따뜻한 기운의 조명 색감을 더하기로 했어요. 이로 인해 납득이가 서 있는 오른쪽 화면은 마치 무대에서 홀로 연기하는 모습으로 표현 된 것이죠. 연출적인 면이 작업하면서 잘 표출된 것 같아 제가 꼽는 명장면 중의 명장면 입니다."

관객이 꼽은 명장면과 그가 꼽은 명장면은 비슷했다. 다만 관객입장에서 꼽은 명장면이 단순히 재미있었던 부분이라면,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컬러리스트는 자신만 알 수 있을 정도의 세세한 색 보정 작업이지만, 관객이 못 알아볼 정도로 완벽하고 치밀한 작업이 잘 표현되었을 때를 명장면으로 꼽은 듯 했다.

수많은 제작과정을 거친 뒤 탄생한 영화가 스크린에 상영될 때 관객이면서 제작자인 그의 소감은 어떨까 궁금해 진다.

"기존 CG작업은 없던걸 만들어내거나 있던 것을 없애는 등 작업한 컷에 대해서 재미를 느끼고 보람을 느꼈어요. 반면, 지금 색 보정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영화는 있는 상태에서 더 돋보이게 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전체적인 분위기를 다 보게 되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객의 입장이 되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겨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제작자로서 영화를 볼 때 참 아쉬운 것이 많죠. '저 부분은 조금만 더 신경 쓸 걸'하면서, 그런 실수를 번복하지 않기 위해서 가급적이면 개봉 전에 더 많이 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곤 해요."

영상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그. 처음에는 컬러리스트를 꿈꾸지 않았단다.

"영상으로 감동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처음에는 CG작업으로 영화에 입문 하게 되었죠. 영상 쪽으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제 종교가 기독교인데요. 교회나 카톨릭 등 성당에 강연할 때 뒤에 서서 보면 사람들이 그리 오래 집중하지 못하더라고요. 그런데 성당에서 강연이나 설교, 미사를 들을 때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중간중간 영상을 틀어주면 꼼짝하지 않고 그것만 보더라고요. 그 짧은 순간에 강하고 집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게 '영상'이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어요. 그래서 조금 더 퀄리티 높은 영상을 배우려고, SBS 아카데미 특수영상 그래픽과정을 밟게 된 것이죠. 당시에 없는 재산 다 쏟아 부어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지금 컬러리스트가 되어서 생각해보니 CG를 하게 된 것은 보다 높은 스킬을 얻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제가 작업한 영화들을 보고 '다른 영화가 생각났어'라는 생각이 안 들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영화마다 콘셉트가 있으니까요"

영화 하나가 탄생하기까지 연출자 외에 보이지 않는 스태프들의 열정과 고생이 담겨있다는데, 그는 '영상'이라는 매체는 참 겸손하다고 전한다.

"사람들 감각 중에서 눈이 제일 즉각적으로 반응하는데 보이는 것에서 냄새를 맡고, 그 냄새에 뇌가 자극 받아서 기억을 떠올리는 것보다,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눈과 적절한 미디어 매체가 결합한다면 좋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면에서 영상이라는 매체가 굉장히 겸손한 매체라고 생각하는데, 그 뒤에는 수많은 스태프들의 열정과 고생이 담겨있죠. 물론 이 열정과 고생은 본인들만 알지만요. 강연하는 사람이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많은 관객이 박수를 쳐주고 보람을 느끼지만, 영상이 좋으면 그 영상을 보고 박수를 치지 영상을 만든 사람에게는 박수를 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에서 영화인들의 고충이 없지 않아 있어요. 하지만 저 같은 경우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처럼, 선한 일을 할 때 왼손이 제 자신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이 일 성격이 그렇고, 제가 이 직업을 좋아하고, 이 일을 하는 이유예요."

이쯤에서 그의 꿈이 궁금하다.

"이 업계에서 성실하게 오래 일을 하고 싶어요. 이상향의 꿈을 말하자면 영상의 감각과 눈과 청각을 이용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데, 많은 사람에게도 좋지만 어떤 한 사람에게만이라도 의미가 있다면 그 영상을 보여주고 감동을 주고 싶어요."

한편, 국내에는 컬러리스트 전문가가 많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꿈을 뒤이어줄 후배인재육성에 관한 계획은 없을까 물었더니 상상마당으로 온 이유와 연관시켜 이야기를 했다.

"상상마당 입사 조건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라' 였는데요. 제 꿈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이 생겼고, 그 꿈을 지속시키려면 후배양성도 해야 해요. 그런 차원으로 입사를 했고, 후배양성을 위해서 지금은 회사에 있는 후배들에게 먼저 제가 가진 능력을 되도록이면 많이 보여주고 알려주려고 해요.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해보게끔 하고, 선배들이 하는 작업은 최대한 많이 봐야 좋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어요. 혹시라도 영상 쪽에 종사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음을 열고 제가 아는 한 모든 것을 알려줄 준비가 되어있으니까요."

"컬러리스트를 꿈꾸는 친구들에게 한마디하자면 컬러리스트는 특별한 자격증이 없어요. 심지어 할리우드도 마찬가지고요. 국내에 학과도 없고, 학원도 없고, 전문 교육기관도 없을뿐더러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정확하게 마련되어 있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영상에 대한 자신의 꿈이 있다면 그 꿈을 크게 갖고 꿈에 관련된 모든 분야를 부합시켜 연결해 나가면 언젠가 진출로는 생기기 마련이에요. 꿈이 없는 자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꿈과 결부된 작은 것이라도 관심을 가져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자신이 찍은 사진을 바꾸는 연습부터 한번 시작해보세요. 말이 색 보정이지 색을 바꿔 보는 거예요. 정답이 없어요. 자기가 찍은 사진을 바꾸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색이고, 콘트라스트이며, 가장 좋은 밝기예요."

디지털 색 보정 작업은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닌, 완성 된 작업에서 마무리작업을 가미하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영화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더 좋은 품질의 영상을 제공하기 위해 그는 한 영화를 수도 없이 돌려본다. 때문에 어쩌면 컬러리스트는 영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 보다 마무리를 책임지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관객이 편안하게 영상을 즐길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긍심을 갖고 일하는 그에게 필자는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