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대학에 입학 하면서 학생 신분일 때, 학생일 때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쭉 써보았던 기억이 난다. 워킹홀리데이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였지만, 그 단어만큼은 내게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23살 대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잠시 학교생활에 콤마를 찍고 드디어 워킹홀리데이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후 어느 나라로 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중 영어권 나라에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가 환경적ㆍ경제적인 면에서 큰 메리트가 있었다. 하지만 벤쿠버에 체류했던 적이 있어 다른 나라로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정했었던 호주! 멜버른으로 가겠다고 생각해뒀을 때쯤, 프랑스로 이민을 간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고 ‘네 전공이면 문화적인 면에서나 유럽권이 더 배울 게 많지 않겠느냐?’는 말에 호주를 생각했던 마음은 프랑스로, 결국 파리로 돌아서게 되었다. 불어가 문제라고? 그냥 배우면 되지 뭐!

하지만 프랑스 워킹홀데이는 너무나 생소했고, 인터넷과 책을 찾아 봐도 수기나 경험담을 찾기가 어려웠다. 준비해야 할 것들과 서류는 프랑스대사관 홈페이지에서 얻는 게 전부였다. 내 주변에는 워킹홀리데이로 어딘가를 갔다 온 사람들도 없어서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다.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준비해야 했던 지라 불안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유학원의 도움 없이 스스로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지 경험해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붙은 여권이 집에 도착했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사실 나는 파리에 대한 환상과 로망이 그리 크지 않았었다. 그냥 유럽 어딘가의 에펠탑이 있는 도시 정도로만 각인되었던 그곳에 발을 내딛던 날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매체에서나 보던 곳을 내 발로 걸어 다닌다는 게 믿기지 않고 황홀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정착 초기의 파리는 마냥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공부해갔던 불어 수준으로 대화는 거의 불가능했고, 지하철은 매우 지저분했으며, 물가는 비싸기만 했다. 무엇보다도 먼 땅에서 혼자 지내는 설움이 가끔 내 기분을 모두 망쳐놓았다. 정착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서 적당히 적응되어 잘 지낸다 싶었는데, 이게 웬일? 프랑스에 라따뚜이 같은 쥐가 많다고는 하지만, 쥐가 내 방에서도 나올 줄이야! 한바탕 쥐 소동이 있고 나서, 나는 곧바로 새 보금자리를 구하는 신세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때쯤엔 이웃집 아기를 돌봐주는 일, 크리스마스 시즌에 샹젤리제 거리에서 열리는 마켓에서 일을 하게 되어 육체적ㆍ정신적으로 매우 힘들었던 시기였다. 매년 12월이면 설레는 24일과 25일 그리고 31일 모두 정신 없이 일하며 보낸 적도 처음, 먼 곳에서 혼자 보내게 된 것도 처음, 그리고 특별한 날들이 평범한 날들처럼 지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껴보았다. 그렇게 외로운 겨울을 보내게 되었다.

나의 파리라이프는 2012년 1월부터 만개하기 시작했다. 힘든 연말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연초부터 원하는 일들이 척척 모두 성사되기 시작했다. 우선 파리시내 외곽에서 시내 가장자리(4구)로 이사를 오게 된 점인데, 정말로 운 좋게 시내치고 비싸지 않은 월세에 프랑스인 아주머니 집에서 홈스테이처럼 지낼 수 있게 된 것! 아주머니네는 내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했던 퐁피두센터에서 2분 거리였기에 내게 이보다 더 완벽한 곳은 없다 싶었다. 그리고 정착 초기에 다녔었던 저렴한 어학원을 그만두고, 프랑스 국가에서 인정받은 알리앙스 프랑셰즈로 옮겨 본격적으로 어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 수업하고, 오후에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아주머니와 함께 식사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불어실력이 꽤 늘게 되었다. 의사소통이 원만해지니 체류도 더 재미있어졌고, 날씨도 조금씩 풀리면서 차츰 파리라는 도시에 녹아들고 있는 나를 보았다.

아닉 아주머니와 함께 사는 5개월 동안, 나는 잠깐이지만 파리지엔처럼 살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문화행사를 보러 다니고, 주말 아침엔 센 강변을 그들과 함께 조깅하고, 바스티유 시장에서 채소와 과일을 잔뜩 사오기도 했다. 그리고 저렴한 와인 한 병과 치즈를 구입하고, 길쭉한 바게트가 밖으로 삐져 나온 가방을 들고 벨리브(파리 공용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던 날, 어색하지 않은 나의 모습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혼자 풋웃음을 지었다. 에펠탑을 보러 갔던 날보다도 더 행복했던 순간이라 생각했다. 타 문화권에 살면서 그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보면서 나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너무나 행복했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생각은 모두 떨쳐버린 채.

파리의 미술관, 박물관, 전시회 등 각종 문화생활을 풍요롭게 누리기 위해 나는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퐁피두 센터, 프랑수아 미테랑 도서관 등등 웬만한 박물관의 연간권을 모두 구입했다. 어학원 학생증으로 (유러피언으로 간주한다) 할인혜택도 빠짐없이 챙겨가며 열심히 보러 다녔다. 워낙 돌아다니는걸 좋아해서 무언가 보러 가는 걸 주저하지 않고 탐욕적으로 하려고 노력했었다. 50여 장이 넘는 입장권과 티켓들을 모아놓은 앨범을 보면 지금 봐도 ‘참 열심히 잘 살았었구나!’ 하고 느낀다.

체류 초반엔 길 잃고 헤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나중엔 물어서라도 내 발로 꼭 찾아 다녔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문화강국인 프랑스의 수준 높은 전시들을 보면서 전공과 관련해서도 많은 걸 배웠다.

유럽이다 보니 어학원에 모인 구성원들도 정말 세계 각국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대부분이 유럽피언이긴 하지만, 살면서 독일, 스페인, 터키, 슬로바키아, 이탈리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브라질 사람과 친구가 되긴 처음이었다.

그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나를, 알파벳도 아닌 한글이라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불어’를 배워나가는 나를 칭찬해주고, 언제나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그래서 한날은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 내 손으로 직접 잡채와 불고기요리를 해주고, K-pop star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막걸리 마시기도 했던 날 또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또 그들이 초대한 파티도 잊을 수 없다. 터키 친구 뚜바, 콜롬비아 친구 디아나, 브라질 친구 파브리시아가 초대했었던 그들만의 파티에서 고유음식도 먹어보고, 그들의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생활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등 서로 문화 교류하던 그 시간은 정말 흥미로운 체험이었다.

1월부터 피기 시작한 낭만적인 파리의 삶은 5월이 되자 내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2달간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을 여행하게 된 것. 파리를 벗어나 나는 더욱 큰 세계를 보고 돌아왔다.

파리에서 뭐 하고 지냈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는 그냥 허허 웃으면서 재미있게 놀다 왔다고 한다. 살면서 가장 심도 있게 놀고 즐긴 10개월.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시도해 보고 도전했었다. 사실 일을 너무 조금만 해서 워킹홀리데이에서 ‘홀리데이’에 해당하는 시간들이 더 길었지만, 꼭 ‘생산적인 일’만이 뭔가를 한 것은 아닐 테니까. 삶을 살아나가는 자세에 대해, 여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려 노력하는 점, 적절한 융통성을 동반하는 행동력 등등 내가 느끼고 배운 것들을 모두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파리는 내게 성숙한 선물을 선사했다.

무엇보다도 여러 가지 요소들을 제쳐 두고 과감하게 결단 내려 떠났던 나 자신이 뿌듯했다.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신 부모님께도 너무너무 감사드린다. 현재 나는 파리에서 만났던 친구들과도, 함께 생활했던 아닉 아주머니와도 계속 연락을 하며 지낸다. 마음속에 자리한 ‘파리’를 떠올리면서, 또 그곳에서 느끼고 감동받았던 그 마인드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앞으로 나에겐 중요한 목표이자 다짐이다.

가서 많은 것을 ‘보고’ 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그것들은 단순히 바라보는 것 이외의 무언가를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