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과 따스한 햇살, 적당히 불어오는 찬바람의 궁합이 참 잘 어울리는 계절이다. 우러러볼수록 높은 가을 하늘은 필자의 마음을 유달리 들뜨게 한다. 한편으로는 2012년을 맞이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곧 2013년이 다가온단다. 그래서인지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감도 없지 않아 있다. 이번 한 해를 의미 있게 보냈는지, 내년 한 해는 또 어떻게 의미 있게 보낼 것인지 스스로와 대화할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고자 고즈넉한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충남 공주로 향하며,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빨갛게 또는 노랗게 나뭇잎이 예쁘게 물들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동학사를 찾은 사람들은 그 모습에 반해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러댔다. 날씨가 좋아서였을까? 동학사를 찾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 등산하는 사람도 보이고, 데이트 즐기러 온 커플도 보이고, 마실 나온 어르신들도 눈에 띈다. 동학사로 향하는 길, 문득 지난 대학 시절이 생각난다. 눈이 많이 내렸던 추운 어느 겨울날, 신입생 환영회를 이곳에서 했었다. 친목을 다진다고 모두 거하게 과음을 하고, 다음날 꽁꽁 얼어붙은 이 길을 거닐며 고생했었다. 또 벚꽃 핀 어느 봄날에는 알밤막걸리를 사 들고 교수님과 이곳에서 야외 수업을 하기도 했다.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이 마냥 즐거웠었던 때가 아련하게 떠오르면서, 풋풋했던 지난날의 필자 모습을 그려본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다시 찾은 동학사는 평온함을 선사한다. 지난날 걸으면 걸을수록 버거웠던 비탈길이 이날만큼은 걸어도 버겁지가 않았다. 오히려 서울 생활에 지쳐있는 나의 심신을 달래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얼마 만에 여유롭게 걸어보는 것인가! 그때는 미쳐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이곳이 지금은 아름답게만 보인다. 그리고 그저 좋다는 탄식만 자아냈다.

동학사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역사의 발자취가 함께 깃들어 있는 사찰이다. 신라 선덕왕 23년에 회의화상이 최초로 건립했는데, 당시 이 절은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청량사’라 칭했다고 한다. 이후 청량사는 고려 태조 3년에 도선국사가 중건하면서 ‘태조의 원당’으로 불렸고, 원당은 조선영조 4년에 신천영의 난으로 모두 불에 타 약 80년 동안 빈 채로 방치되었다. 그 뒤 순조 14년에 금봉화상이 옛 원당 터에 절을 중건하면서 ‘동학사’로 개칭했고, 고종원년에 만화화상이 동학사를 새로 세웠다. 이런 역사의 굴곡 속에서 꿋꿋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바로 동학사이다.

걷다 보니 어느새 동학사 중심 건물인 대웅전까지 들어섰다. 이곳은 도력과 법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고 한다. 한 젊은이가 대웅전 앞에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한다.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더니 조금은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자리를 유유히 떠난다. 필자 또한 젊은이가 서 있던 곳에 가 경건히 기도했다. 2012년 한해, 너무 정신 없이 보내다 보니 나를 위한 시간을 주지도 않았고,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돌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내년에는 이번 해에 놓쳤던 모든 것을 다시 품고 갈 수 있도록 말이다. 기도를 마치고 그 자리를 돌아섰을 때 왠지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웅전 앞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8호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단층 기단 위에 3층을 쌓아 올려세운 탑으로 높이는 1.85m,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탑신의 각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져 있고,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 받침을 새겨 놓았다.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석탑 근처에는 동전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어떤 이는 석탑을 두고 소원을 빌었나 보다.

1.6km 정도 산을 더 오르면 두 개의 탑을 만날 수 있다. 바로 유명한 ‘남매탑’이다. 청량사지 5층 석탑과 청량사지 7층 석탑이라고도 불리는 이 탑들의 유래는 실제 어느 남매 이야기가 아니다. 신라 성덕왕 15년에 당나라 상원대사가 국내 명승지를 밟다가 마지막으로 계룡산을 택했고, 계룡산 동굴에서 수도하던 스님은 입속에 가시가 박혀 울부짖는 호랑이를 구해주었다.

그 호랑이는 스님에게 은혜를 갚고자 한 아리따운 처녀를 물어다 놓았다. 당황한 스님은 수도승으로 남녀의 연을 맺지 못해 처녀를 귀가시켰으나, 인연이 닿아 결국 남매의 의만 맺고 함께 수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한날 한시에 열반하자 이 둘의 사리를 모신 탑이 바로 남매탑이라고 한다. 남매탑 주변을 맴도는 관광객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 없이 유심히 쳐다보고만 있다. 그 분위기에 필자도 덩달아 넋 놓고 우러러보았다.

그 외 동학사 내에는 계룡초혼각지, 삼성각, 삼은각, 숙모전 등의 다양한 문화재가 자리하고 있다.

공주터미널에서 금강 쪽을 바라보면 커다란 성곽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교 근처였음에도 단 한 번도 공산성을 거닐어본 적이 없다. 밤이 되면 밝은 불빛이 성곽을 밝혀주어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고, 언젠가 꼭 한번 가보기로 했던 곳을 드디어 가게 되었다. 공산성은 백제 시대의 중요한 산성이다. 원래는 웅진성 이었으나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고, 성벽 안에는 7~8m의 호와 우물터, 영은사, 광복루, 쌍수정, 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백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공주 투어 때 빠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공산성 매표소를 출발로 천천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비석이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관찰사가 1년 임기를 끝내면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공주 시내 곳곳에 퍼져있던 비석을 한곳에 모아두었다고 한다.

입구를 들어서면 왕과 왕비, 장군이 되어볼 수 있는 의상 체험실이 있는가 하면, 활쏘기 체험과 전통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어린아이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된 듯, 활쏘기를 하고, 옥사체험 등 장난치며 그 시절을 재연했다. 그 순수함에 나도 모르게 함께 재연할 뻔했다.

산성투어 하는 데는 약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1시간 30분 이내에 전각들의 수려한 자태를 볼 수 있기도 하고, 활짝 핀 코스모스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여느 궁처럼 내부출입이 금지되어 있지 않아 공산성의 전각 내부를 자유롭게 체험할 수 있어서 더욱 즐거웠던 것 같다.

가파른 계단을 겨우 올라, 공산성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공산정’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금강교, 공주의 전경을 내려다보니 왜인지 속이 시원하고 통쾌한 기분이다. 매번 서 있는 곳 반대편에서 작은 실루엣으로만 보았던 공산정에 서 있으니 공주투어를 완벽하게 다 한 것만 같다. 다만 다음 일정 때문에 금강의 낙조와 야경을 이곳에서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해가 기웃기웃 넘어갈 무렵, 6시면 석장리 박물관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빠르게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구석기시대에 처음 나타난 인류의 조상이 어떻게 인간이 되어가는지 유물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다양한 도구는 언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 사용했는지 등도 함께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구석기인들이 살아가던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도 있고, 석장리 유적 등을 직접 볼 수도 있다. 아쉽게도 건물 내부는 사진촬영이 불가능해 필자의 눈으로만 그 모습을 가득 담고 왔다. (그럼에도 몰래 사진 몇 컷을 찍어왔다.) 사실 석장리 박물관에서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은 책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하지만 책에서 보는 것과 실제로 재연해 놓은 것을 보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야외의 자연환경 속에서, 등산의 탐방로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무한한 선사 인들의 체취가 샘솟는 현장을 처음으로 직접 경험했다는 데에 필자는 즐거웠던 여행이라 말하고 싶다.

날씨가 금새 어둑해졌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무사히 하루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유독 이날은 ‘하루가 이렇게 길었나?’ 싶다. 일하느라 바쁘게 지낼 줄만 알았지, 여행으로 바쁘기는 새삼 오랜만인 듯 하다. 최근 많이 지쳐있던 지라 이번 여행은 ‘힐링’이 된듯하다. 좋은 날, 좋은 길을 걸으며 나만의 시간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지독히 역사공부를 싫어했던 필자로써 자발적으로 역사공부를 하러 왔다니! 스스로 기특해 하고 있는 중이다. 끝으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겪었던 하루가 역사로 남기 마련이다. 다가오는 2013년 앞에서 필자는 다짐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오늘 하루를 사는 나는, 내일 다시금 돌이켜 보아도 당당하고 멋있었으면, 단 하루를 살더라도 후회 없이 지내기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