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대부분의 학생이 어학연수를 위해 많은 준비를 하는 반면, 나는 조금 달랐다. 애초에 영어를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은 없었고,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일본의 대지진 이후 부모님의 반대로 일본행 비행기를 탈 수 없었던 나는 방황하던 중에 필리핀 어학연수를 알게 되었다. 일본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던 터라 필리핀에 대한 정보가 없었음에도 워킹홀리데이협회에서 연수준비를 잘 해주신 덕분에 긴장은 되었지만, 문제없이 출국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도 내가 선택한 지역은 세부. 신혼부부들이 가장 많이 가는 지역이다. 내가 머문 곳은 세부시티 내에 있는 CPILS라는 학원이었다. CPILS학원은 세부에서 가장 오래된 학원이어서 그런지 자부심과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학원에 비해 커리큘럼이 탄탄하고, 학생들 관리가 철저한 학원이었다.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것은 보통 공항에 도착하면 학원 픽업 담당자가 나와 학생을 학원으로 바로 데리고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CPILS학원에서는 아이스박스에 차가운 생수를 담아와 학생들 개개인에게 나누어준 후 픽업 했다. 필리핀의 더운 날씨를 고려한 것이었다. 사소한 부분이지만 다른 학원보다 세심히 학생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시작되었고 5개월 동안 CPILS학원에 머물렀다. 짧으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5개월 동안,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할 많은 것들을 경험했다.

먼저 필리핀에는 1년 365일 어딘가에서 Holiday가 열린다. 그중에서도 세부에서 가장 큰 행사인 시눌룩 축제(Sinulog Festival).

100년 전통이 있다고 하는 이 축제는 다른 섬에 있는 필리핀 사람들도 세부를 방문할 정도로 거대한 축제이다. 그래서 축제기간 동안에는 차량통제는 물론이고, 사람이 걸어서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필리핀은 90% 이상이 기독교인인 기독교 국가이다. 그래서 이 축제는 아기 예수를 격려하기 위해 기도와 춤을 추면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북 장단에 맞춰서 두 걸음 걷고, 한 걸음 뒤로 가는 동작을 반복했다. 나 또한 길거리에 나가 구경을 했다. 그 광경은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신이 난다고 무작정 따라 나가면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유는 사람들이 북적이고 혼잡한 틈을 타 소매치기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어학연수 중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맑은 바다와 자연이다. 필리핀에는 7천여 개의 섬이 있다. 그중에서도 막탄섬, 모알보알, 보홀, 보라카이는 배를 타고 쉽게 갈 수 있기 때문에 평소 학업에서 받은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관광도 할 수 있어서 좋다. 한편, 관광하기에 앞서 한 가지 팁을 주자면 필리핀은 날씨가 덥다 보니 모기와 같은 해충이 많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여행을 갈 때에는 해충 기피제 같은 것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필리핀의 매력 때문에 종종 많은 학생이 연수를 갔음에도 공부하는 것을 망각하기도 한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어학연수학원에 한국인만 있겠구나.' 싶었는데 가보니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주를 이루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소수이지만 중국, 러시아, 프랑스 등 많은 나라에서 필리핀으로 연수를 왔다. 각국에서 오는 친구들 때문인지 학원에 머무는 동안에는 영어를 항상 쓸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평일에는 수업을 들으며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외국인 친구들이나 현지 선생님들과 여행을 가서 실제로 영어를 써볼 수 있기 때문에 놀면서도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만큼 놀 수 있는 문화도 매우 잘 갖춰져 있다. 그래서 남학생들은 클럽이나 술집 등 유흥문화에 쉽게 빠지는 경우가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마인드 컨트롤을 열심히 했다. 그 덕분인지 이후 학원에서 픽업아르바이트를 시작해 용돈도 벌고, 추가수업을 무료로 듣는 등 뜻 깊은 시간을 보냈다.

5개월 동안 겪은 일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또 하나의 경험은 사실 지진이었다. 어학연수를 온지도 4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오전 수업을 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건물이 크게 흔들렸다. 사실 처음에는 지진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놀라 뛰쳐나가고 나서야 알았는데, 생각보다 규모가 큰 지진이어서 학생들과 선생들은 모두 패닉상태였다. 나는 처음 겪은 일이라 무섭기 보다는 그저 신기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여진과 쓰나미 경보는 나까지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오후 수업 도중에는 직원이 급하게 문을 두드리더니 쓰나미가 온다고 해서 건물 옥상으로 대피하라고도 했다. 학원 근처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짐을 싸들고 도망가는 것을 보니 정말 큰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 쓰나미는 오지 않았다. 정말 5개월 동안 사소한 것부터 자연재해까지 다 겪었던 어학연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