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넓은 우리학교 캠퍼스.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빠르게 걸어도 족히 15분은 걸린다. 아침도 못 먹고 뛰느라 숨이 가쁘다. 3학년이 되자 밀려드는 과제들 때문에 어제도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는데 오늘은 조별 모임에 저녁엔 동아리 회의까지……. 또 다른 약속은 없던가? 봄바람은 코끝을 스치고 난 바람보다 빠르게 강의실로 뛰어 들어간다. 교수님께서 오시기 전 스크린을 내리고 강의교구와 빔 설치. 자진해서 수업준비를 맡아놓곤 이제 와서 늦을 수는 없다. 아침이라 그런지 기계는 생각보다 차갑다. 책상위에 내려놓고 움직이지는 않는지 확인한 뒤 여기저기 발에 채여 더러워진 전선을 콘센트에 꽂는다. 손에 뭍은 먼지를 털고 있으면 하나 둘 학우들이 들어온다. 뒤편에서 들리는 끼익 하고 의자 끄는 소리, 빵 봉지를 부스럭대는 소리, 얼굴만 아는 여자후배의 높은 목소리도 들린다. 별것도 아닌 이 평범한 아침이 고맙다.

애초부터 부모님께선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셨다. 어린 내 눈에도 그리 보였으니 아마 실제로는 더 했으리라. 그래도 별 문제없이 그럭저럭 살아왔다. 부잣집은 아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고 화목하진 않았지만 남들처럼 한두 달에 한 번씩은 외식도 가고 마당에선 개도 키우는 평범한 가정. 아들 둘 있는 집이 그렇듯 동생과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옷에 흙을 묻혀왔고 어머니께서는 이에 질세라 매일 깨끗한 옷을 내어입혀 들어올 때 꼴이야 어찌됐든 집을 나설 때는 말간얼굴로 나가게 하셨다. 작지만 본인이름의 가게를 하셨던 아버지. 가끔 취해서 집으로 들어와 어머니께 싫은 소리를 들으셨던 다른 집 아빠들과 별 다를 것 없던 보통의 아저씨. 우리 가정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건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부터였다. 그 뒤는 뻔한 이야기. 하도 흔해서 이젠 드라마로도 안 만드는 그런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났다. TV로 볼 때는 유치하던 스토리가 내가 직접 살아내려니 지옥 같았다. 가게가 망하면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은 잦아졌다. 속에서부터 곪아있던 관계는 어려움이 닥치자 그대로 터져버렸다. 한창 예민하던 고등학생 때 부모님께서는 이혼을 하셨다. 부모님은 나에게 미안해 하셨지만 나는 괜찮았다... 라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두 분의 문제 아닌가. 하지만 정말로 문제였던 것은 두 분의 감정다툼이 아닌 돈이었다. 이 작은 동네에서 돈을 빌린 상대는 주변의 이웃 분들이었고 가게가 망하자 아버지께서는 갚을 수 있는 대로 돈을 돌려주셨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가진 것 하나 없이 어머니께선 우리 둘을 키우셔야 했고 어디론가 떠나신 아버지 대신 모든 눈총을 다 받으셔야 했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한다며 어머니께선 나를 대학교에 보내셨고 2006년 지칠 대로 지쳐 어딘지도 모르고 쓸려 내려가듯 대학에 입학했다.

직업을 가져야 한다면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한건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속의 난 누굴 돕기는커녕 친척어른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한 학년을 다닐 수 있었다. 생활비와 3살 어린 동생의 학비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남자 둘이 먹어대는 밥만 해도 양이 엄청났다.

- 쌀 한말이 한 달도 못 갔다. 우째 그래 먹어대노?

어머니께서 그 당시를 회상하실 때면 가장 먼저 꺼내시는 첫 마디다. 동생도 나도 마음이 텅 비었을 때였다. 내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 목구멍으로 밥을 넘긴 것이나 동생이 학교 친구들과 싸워대며 어머니를 학교로 출퇴근시킨 것은 마음이 아픈 까닭이었을 것이다. 집안일이 신경 쓰여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엉망인 학점을 받아들고 한참을 고민하다 휴학계를 내고 입대를 1년 미뤘다. 군에 입대하기 전 생활비는 벌어놓고 들어가야겠다 싶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주위 어른들께서 소개해주신 공장에 들어가 12시간씩 일을 하며 오로지 돈 생각만 했다. 그 시절에는 학업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한 일 년 벌어서 가족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나머지 내 인생은 군대에 갔다 와서 생각하자는 마음 뿐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도 그들을 부러워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도 꾸준히 일을 하시고 나도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입대를 할 수 있었다. 군대 다녀오는 동안 둘이서 굶어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처량한 생각을 하며 기차를 탔던 기억이 난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오히려 군 생활은 편하게 느껴졌다. 제때에 나오는 밥,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옷, 몇 푼 안 되지만 통장에 들어오는 월급.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까지……. 사춘기 이후 처음으로 '나'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었다.

- 학교는 그만두고 바로 취직이나 할까?

휴학하는 동안 일 했던 공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었다. 월급도 상당했었고 정식 사원으로 채용 할테니 들어오라고 권유도 받았던 터라 취직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마음을 바꾸게 된 건 직장을 관두고 해외로 봉사를 나간다며 훌쩍 떠난 친한 누나의 한마디였다.

- 할 수 있는 걸 하고 살리카면 어떡하노. 하고 싶은걸 하고 살아야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바이킹을 탄 것처럼 마음이 철렁했다. 그래야지. 하고 싶은걸 하고 살아야지. 그때부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뭔지 찾기 시작했다. 돈 걱정 안 해도 되는 공장을 다닐까, 워킹비자를 받아 호주로 가볼까, 대학공부를 다시 시작할까, 다시 공부를 한다면 무슨 전공을 해야 할까……. 해답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었다. 늘 하고 싶었던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것. 그리고 난 이미 그 과에 입학한 상태였다.
제대 후 다시 휴학계를 내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번엔 생활비가 아니었다. 내 학비를 벌었다. 아르바이트도 공장이 아닌 시청에서 자리를 구했다. 급여는 많이 적었지만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에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급여를 쪼개 생활비에 보태고 열심히 저축하여 힘들게 한 학기 등록금을 만들었다.

휴학이 끝나고 학교를 찾았다. 학교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가난했고 삶의 무게에 눌려 허덕이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꿈을 품고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수업도 가장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듣고 토론과 질문도 적극적으로 했다. 교수님들께서도 나이 많은 복학생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좋게 봐주시는 듯 했다. 하루는 우리 과 교수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 활동하고 있는 동아리가 있나?
- 없습니다.
- 이번에 내가 담당교수를 맡아서 '절주' 동아리를 만들어볼까 하는데 한번 생각해봐.

1학년 때는 교수님들께서 내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모르셨다. 이렇게 따로 불러서 뭔가를 권유해 주시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는데 노력해서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술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절주 동아리의 열성 회원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게 꿈같은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업이 재미있다고 생각한건 처음이었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내가 2학기 때는 성적 우수 장학금까지 받을 수 있었고 근로 장학생까지 병행하며 무사히 2학년을 마쳤다. 교수님 추천을 받아 일본 사회복지기관으로 견학 및 봉사활동도 다녀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했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또 돈이 문제였다. 지긋지긋한 가난. 부끄럽다거나 남에게 숨기고 싶은 그런 마음이 아니다. 달아나고 싶었다. 2학년 2학기 학비와 생활비를 버느라 아르바이트와 학교 근로를 하며 수업을 듣다보니 3학년 1학기 성적우수 장학금을 놓쳐버렸다. 3학년 등록금이 막막했다. 1년 벌어 한 학기 등록금을 대면 대체 대학을 얼마나 오랫동안 다녀야 하는 건가……. 주변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그리고 그때, 모든 것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던 그 순간 기적이 나를 도왔다.

- 2012년 한국장학재단 장학금 지급 확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고 했다. 그만큼 절박했고 절망스러웠던 시간, 언뜻 스쳐본 인터넷 뉴스는 나에게 희망이었다. 장학금 1유형. 기존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게 지급되던 장학금이 대상을 확대하여 실시된 것이다. 특히 한 부모가정인 나에겐 너무 고마운 제도였다. 기사로 크게 보도가 되었으니 그만큼 지원자도 늘었을 것이다. 서둘러 서류를 준비하고 팩스를 넣었다. 잘 도착하였는지 궁금하여 문의전화를 해봤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얼마나 바쁜지 전화기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죄송해서 급하게 끊으려는데 오히려 나를 붙들고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다.

- 팩스는 너무 많이 들어와서 도착을 바로 확인하긴 어렵습니다. 컴퓨터로 파일을 올리시면 바로 확인이 가능 하실 거예요.

팩스 확인을 하시려면 내일 몇 시쯤 연락을 다시 달라고 하시며 파일을 올리는 곳은 어느 곳 어디를 들어가면 된다고. 서류는 쌓이고 전화는 밀려와 마음이 급하셨을 텐데도 지원자의 불안한 마음을 아시는 듯 상세히 알려주셔서 무사히 접수를 끝냈다. 사람이 많이 몰려 과연 탈 수 있을까 결과를 기다리는 내내 초초했다.

앞문이 열려 봄바람이 다시 얼굴에 닿았다. 부스럭거리던 소리도 후배의 높은 목소리도 조용해진다. 어느덧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다. 교탁위에 교수님 책 등이 닿아 경쾌한 소리를 낸다. 나는 3학년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가난하고 삶의 무게는 한층 더 무거워졌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이번학기에는 복수전공인 심리학과의 수업까지 추가로 들어 시간표가 빡빡하다. 사회복지 중 정신보건분야에 특별히 관심이 가 복수전공까지 이수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올 여름 방학 때는 지난번에 미술치료 봉사활동을 했던 기관으로 한 번 더 봉사를 나갈까 계획을 하고 있다. 정신보건에 대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이번에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성해 봐야겠다. 2년 전에 시작한 학과동아리는 사람이 두 배 이상 늘어 회원이 20명이 넘었다. 동생은 부사관으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육군하사관이 되었다. 말썽을 부린 만큼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고 있는 동생이 고맙다. 동생덕분에 어머니께서는 한결 편안해 지셨다. 그리고 해외봉사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그 누나는 나의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되었다.

도움이 간절했던 순간이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내 손을 잡아준 것은 한국장학재단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절묘한 시기에 한국장학재단을 만날 수 있었을까.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따뜻하게 웃어 보이고 싶다.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필요하다. 이 한바가지 정도의 물만 있으면 펌프는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끌어올릴 수 있다. 하지만 마중물이 없으면 펌프는 쓸모가 없어진다. 아무리 많은 물을 품고 있어도 끌어올릴 힘이 없으면 물을 뱉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장학재단의 도움은 나에게 마중물과도 같았다. 말라버리려는 그 순간에 나에게 물을 부어주어 내 안에 묻혀 있던 그 많은 꿈을 펼칠 수 있게 도와준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마중물이 되어주고 싶다. 앞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한국장학재단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학생들은 다시 어려운 누군가를 도와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 없인 일어설 수 없었던 내가 소외받는 사람들을 돌보는 사회복지사의 꿈을 꾸듯 말이다. 나에게 희망이 되어준, 그리고 남아있는 대학생활 동안 희망이 되어줄 한국장학재단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